
‘대통령 빼고 다 해봤다’는 수식어가 따라붙는 이회창 전 한나라당 총재는 대한민국 정치사에서 독특한 위치를 차지한다.
대법관, 감사원장, 국무총리 등 엘리트 코스를 밟으며 ‘대쪽’ 이미지를 쌓았지만, 번번이 대권 문턱에서 좌절하며 ‘영원한 2인자’라는 꼬리표를 떼지 못했다.
그의 3번의 대선 도전은 왜 번번이 실패로 끝났을까? 이 질문에 대한 답을 찾기 위해 이회창의 정치 역정을 심층적으로 분석하고, 그 패배 원인을 다각도로 조명해 보고자 한다.
‘대세론’의 함정과 시대정신과의 불일치

이회창은 1997년, 2002년 대선에서 연이어 ‘대세론’을 형성하며 유력 후보로 떠올랐다.
그러나 막상 뚜껑을 열어보니 결과는 참패였다.
‘대세론’에 안주하며 변화하는 시대정신을 제대로 읽지 못하고, 유권자들의 다양한 요구를 수용하지 못했던 것이 패인이었다는 분석이 있다.
-경직된 이미지와 소통 부족
‘대쪽’ 이미지는 3김 정치에 염증을 느끼던 유권자들에게 신선하게 다가왔지만, 동시에 경직되고 권위적인 이미지를 심어주었다.
유권자들은 그에게서 ‘정’을 느끼기 어려웠고, 서민들과 소통하는 능력 또한 부족하다는 평가를 받았다.
이러한 이미지는 대중에게 친근하게 다가갔던 김대중, 노무현 후보와 대비되며 그의 지지율 확장에 걸림돌로 작용했다.
-시대 변화에 둔감한 정책
이회창은 반공주의, 자유시장경제, 대북 강경책 등 보수적인 가치를 옹호했지만, 시대 변화에 발맞춘 유연한 정책을 제시하지 못했다.
특히 김대중 정부의 ‘햇볕정책’에 대한 비판적인 입장은 남북 화해 분위기를 원하는 유권자들의 공감을 얻지 못했다.
2007년 대선에서는 “선진화의 조건인 법치주의와 대북정책의 변화를 국민에게 직접 호소하기 위해서” 출마했지만, 이미 시대는 변화를 요구하고 있었다.
결정타였던 ‘병풍’ 논란과 잇따른 악재

이회창의 발목을 잡았던 가장 큰 요인 중 하나는 두 아들의 병역 면제 의혹, 이른바 ‘병풍’ 논란이었다.
이는 공정성을 중시하는 유권자들에게 큰 실망감을 안겨주었고, 그의 도덕성에 치명적인 타격을 입혔다.
더불어 IMF 외환 위기, 측근들의 비리 의혹 등 잇따른 악재는 그의 이미지를 더욱 실추시키며 지지율 하락을 부추겼다.
-1997년 대선: ‘병풍’과 IMF의 그림자
1997년 대선 당시 불거진 ‘병풍’ 논란은 이회창에게 씻을 수 없는 상처를 남겼다.
아들들의 병역 면제 과정에 대한 의혹은 그의 지지율을 급락시켰고, 경쟁 후보였던 김대중에게 유리하게 작용했다.
설상가상으로 IMF 외환 위기가 터지면서 보수 정권에 대한 불신이 팽배해졌고, 이는 이회창의 패배로 이어졌다.
-2002년 대선: ‘색깔론’과 엇갈린 민심
2002년 대선에서는 ‘병풍’ 논란을 극복하고 다시 한번 대권에 도전했지만, 노무현 후보의 ‘개혁’ 이미지에 밀려 고배를 마셨다.
당시 이회창은 ‘색깔론’을 제기하며 보수층 결집을 시도했지만, 이는 시대착오적인 전략이라는 비판을 받았다.
또한, ‘미국에 우호적인 후보’라는 인식은 반미 감정이 고조되던 당시 상황과 맞물려 부정적인 영향을 미쳤다.
3수, 엇나간 선택과 쇠락

2007년, 이회창은 한나라당을 탈당하고 무소속으로 대선에 출마하는 강수를 둔다.
그러나 이는 “정권 교체에 대한 국민의 열망에 부응해주기를” 바랬지만 “한나라당의 경선과정과 그 후의 상황을 지켜보면서 이러한 기대를 접을 수밖에 없었”기 때문이라는 명분은 공감을 얻지 못했다.
이미 두 번의 실패를 경험한 그에게 유권자들은 더 이상 기회를 주지 않았고, 그의 정치적 영향력은 쇠퇴하기 시작했다.
결국 그는 세 번째 대선에서도 고배를 마시며 ‘영원한 2인자’로 남게 되었다
이회창의 사례는 정치인에게 시대정신을 읽고 유권자와 소통하는 능력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보여준다.
아무리 훌륭한 경력과 강직한 이미지를 가졌더라도, 변화하는 시대에 발맞춰 유연하게 대처하지 못하면 유권자들의 마음을 얻을 수 없다는 것을 그는 몸소 증명했다.
그의 실패는 후대 정치인들에게 ‘소통’과 ‘변화’라는 중요한 교훈을 남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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뱡풍과대조작 공작이다. 김대업 뼝풍조작 공작.